로고 공모전 탈락 이유 — 아이디어를 세 겹으로 쌓았더니 하나도 안 보였다 (낙선전 ②)
이번에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색도 공간에 맞췄고, 브리프가 형태에 대해 요구한 것에도 정확히 답했습니다. 제 딴에는 꽤 영리한 답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복기해 보니, 이번 실패는 답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답을 너무 많이 찾아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원칙을 다시 밝혀 둡니다. 의뢰 고객의 요청사항 원문은 옮기지 않고 디자인 판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제 언어로 요약하며, 복기의 칼날은 의뢰나 심사가 아니라 제 작업만을 향합니다.
브리프가 요구한 것 — "한글 초성으로 보여 달라"
의뢰는 신규 개원하는 XX 근막스트레칭 센터의 로고였습니다. 몸의 긴장을 풀고 움직임을 회복시키는 프라이빗 바디케어 공간이고, 브랜드가 원한 인상은 호텔 스파와 에스테틱이 지닌 차분함과 고급스러움이었습니다.
브리프가 형태에 대해 유난히 구체적이었다는 점이 이 의뢰의 특징입니다. 한글 초성을 이용해 이 센터가 어떤 곳인지 보여 주는 로고를 선호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영문 쪽에서도 몸을 깨우고 활성화한다는 감각이 드러나기를 바랐고, 스트레칭·케어·빛·힐링·움직임이라는 키워드 중 하나라도 초성이나 영문에 담기기를 원했습니다. 명함, 간판, 실내 사인, 블로그와 SNS 프로필에서 쓰이되 한눈에 어떤 곳인지 보여야 한다는 조건도 함께였습니다.
요구 사항이 이렇게 구체적인 브리프는 디자이너에게 오히려 반갑습니다. 방향을 헤맬 일이 없으니까요. 저는 이 문장을 읽고 곧장 초성으로 갔습니다.
내가 낸 답 — 초성 ㅇ과 ㅎ으로 지은 사람
심볼의 뼈대는 브랜드 이름 두 글자의 첫소리, ㅇ과 ㅎ입니다. ㅇ은 바깥을 감싸는 가는 원이 되었습니다. ㅎ은 점과 원으로 이루어진 글자인데, 그 점을 사람의 머리로, 원을 사람의 몸으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 심볼은 초성이면서 동시에 웅크렸다 일어서는 사람이고, 영문 첫 글자 On의 O이기도 합니다. 한 형태가 세 가지로 읽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색은 웜 다크 브라운으로 잡았습니다. 1편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우드 톤 공간을 먼저 떠올린 뒤 고른 색입니다. 조합은 가로형, 세로형, 그리고 심볼이 O 자리를 대신하는 일체형 세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아이디어 자체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초성을 요구한 브리프에 초성으로 답했고, 그 초성이 사람이 되게 했고, 그 사람이 영문 글자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문제는 이 세 겹이 서로를 도운 게 아니라 서로를 가렸다는 데 있습니다.
탈락 이유 ① — 가장 흔한 해석이 나머지를 덮었다
중의적인 로고의 교과서 사례는 페덱스입니다. E와 x 사이의 빈 공간이 화살표가 되는 그 로고요. 그런데 페덱스가 성공한 구조를 뜯어 보면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1차 해석은 어디까지나 'FedEx'라는 글자이고, 화살표는 알아챈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너스입니다. 1차 해석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2차 해석이 발견의 즐거움이 됩니다.
제 심볼은 그 순서를 짜지 않았습니다. 초성과 사람과 알파벳을 동등한 무게로 겹쳐 놓았고, 그러자 관객의 눈은 셋 중 가장 익숙한 형태를 골랐습니다. 원 안에 사람. 하필 그것이 세 겹 중 가장 진부한 층입니다. 요가원, 필라테스 스튜디오, 재활 클리닉, 명상 앱까지 수천 개 브랜드가 쓰는 웰니스 업계의 공용어니까요. 고유한 두 겹, 그러니까 이 브랜드만 쓸 수 있는 초성과 영문 일체형은 그 진부한 한 겹에 가려 보너스 자리로 밀려났습니다.
여기서 이번 편의 교훈이 나옵니다. 중의성은 미덕이 아니라 비용입니다. 한 형태에 의미를 겹칠 때는 무엇을 1차로 보이게 할지 먼저 정하고, 나머지는 발견의 보상으로 남겨야 합니다. 위계 없이 겹치면 관객은 가장 익숙한 층을 고르고, 그 층이 하필 흔한 것이면 나머지 아이디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집니다.
1편의 실패와 헷갈리기 쉬운데 원인이 다릅니다. 1편에서는 모노그램이 아예 읽히지 않아서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잘 읽혔습니다. 다만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층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층으로 읽혔습니다. 전달이 안 된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이 전달됐습니다.
탈락 이유 ② — 한글에서 태어난 심볼인데 주인공은 영문이었다

세 겹을 넣었지만 관객에게 도달한 것은 그중 가장 흔한 한 겹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심볼이 아니라 락업, 즉 요소들의 배치에 있습니다. 목업을 보시면 가장 크고 굵은 것은 영문 워드마크입니다. 한글은 그 아래 작은 부제로 놓여 있습니다. 심볼의 뿌리가 한글 초성인데, 완성된 로고에서 한글은 가장 작고 가장 약한 요소가 된 것입니다.
클라이언트가 초성을 요구한 이유를 이제 와 다시 생각하면, 단순히 형태의 재료를 지정한 게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 브랜드의 한국어 정체성을 눈에 보이는 주인공으로 세워 달라는 뜻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저는 그 재료로 심볼을 만들어 놓고는, 정작 무대의 가운데에 영문을 세우고 한글을 자막처럼 내렸습니다. 아이디어의 뿌리와 결과물의 무게중심이 정반대를 향한 셈입니다.
제가 가장 아꼈던 일체형, 그러니까 심볼이 On의 O 자리에 앉는 조합은 이 어긋남을 오히려 심화시킵니다. 영리한 장치인 것은 맞지만 심볼을 영문에 묶어 버리기 때문에, 한글이 주인공이 되는 조합은 애초에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다시 한다면 한글 워드마크가 주인공이고 영문이 보조인 락업을 반드시 한 벌 함께 냈을 것입니다. 심사자가 초성 아이디어를 알아볼 확률은 그 한 벌에서 훨씬 높았을 테니까요.
톤도 반 발짝 어긋났습니다. 요구는 호텔 스파와 에스테틱의 온도였는데, 둥근 지오메트릭 산세리프는 친근하고 대중적인 인상이 강합니다. 색은 공간과 잘 붙었지만 글자의 성격은 고급 스파보다 동네 스튜디오 쪽에 서 있었습니다.
MARKIVE 7원칙 자가 채점
남의 로고에 하던 대로 MARKIVE 7원칙으로 제 출품작을 채점합니다.
M(의미) 13/15 — 초성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글자가 되는 구조에는 분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A(진정성) 11/15 — 초성은 이 브랜드만 쓸 수 있는 재료라 뿌리는 고유합니다. 다만 표면의 인상이 카테고리 클리셰로 수렴했습니다. R(인지성) 8/15 — 이 글의 핵심 감점입니다. 잘 읽히긴 했으나 가장 평범한 층으로 읽혔습니다. K(단순함) 15/20 — 요소는 절제했지만 얇은 원과 겹친 곡선이 명함 크기에서 뭉칠 위험이 있습니다. I(아이디어) 9/10 — 삼중 중의는 분명한 한 끗입니다. V(가치) 6/10 — 판정 유보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까요. E(감정) 9/15 — 차분함까지는 닿았지만 고급의 온도에는 못 미쳤습니다.
합계 71점, '준수' 등급입니다. 1편이 72점이었으니 사실상 같은 자리입니다. 아이디어 점수는 1편보다 확실히 높은데 총점이 같아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정직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넣는 것과 그 아이디어가 관객에게 도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로고는 후자로 채점되기 때문입니다.
MARKIVE 노트
두 편을 쓰고 나니 불편한 사실이 하나 보입니다. 두 시안 모두 70점대 '준수'입니다.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런데도 둘 다 떨어졌습니다. 공모전은 준수한 로고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그 브랜드에 가장 맞는 로고 하나를 뽑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70점짜리가 스무 개 모인 자리에서 준수함은 아무 무기가 되지 못합니다.
실패의 결은 두 편이 정반대입니다. 1편에서 저는 브리프를 덜 읽어서 틀렸습니다. 이번에는 브리프에 정확히 답해 놓고, 그 답이 관객이 아니라 저에게만 잘 보이도록 배치해서 틀렸습니다. 전자가 부주의라면 후자는 욕심입니다. 하나의 형태에 세 개의 의미를 넣고 싶었고, 그 욕심이 위계를 지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의 문장은 이렇게 남깁니다. 로고에 아이디어를 몇 개 넣었느냐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묻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저게 뭐로 보이느냐. 자기 브랜드의 로고를 만들고 계신 분이라면, 시안이 마음에 들 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한 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층과 처음 보는 사람이 실제로 보는 층이 같은가. 그 점검을 어느 단계에 넣어야 하는지는 로고 만드는 법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낙선작을 두 장째 걸어 놓고 보니, 이 전시회의 가장 성실한 관람객은 결국 저 자신입니다. 다음 편에서 또 한 장을 걸겠습니다. 그때는 부디 또 다른 종류의 실수이기를.
로고를 읽다, Mark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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